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라도 유화 혹은 수채화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텐데요. 유화(油畵)란, 말 그대로 '기름'으로 갠 물감을 사용한 그림을 뜻하며, 수채화(水彩畵)는 여러 가지 안료들을 '물'에 풀어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유화와 수채화 작품의 예시
유화와 수채화는 한 눈으로 보아도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유화의 경우는 화면이 불투명하고 붓 자국이 확연히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수채화의 경우는 그림이 투명하면서 붓 자국이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또한 유화의 경우에는 물감이 마르고 나면 다른 색으로 덧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수정이 용이한 반면, 수채화는 덧칠을 하면 할수록 색이 탁해지고 어두워지기 때문에 수정이 거의 불가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Aydin Aghdashloo, <Cover Design, Portrait of Kamal-Al-Molk>, 1987
그렇다면 위 그림은 유화일까요, 수채화일까요? 유화라고 하기에는 색조는 선명하지만 윤기가 없고, 무엇보다 화면 하단에 물감이 번져있는 부분이 신경이 쓰이실 텐데요. 반면 화면 상단에는 수채화에서는 보기 힘든 불투명성이 느껴집니다.
유화도 수채화도 아닌것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이 작품이 바로 '과슈(Gouache)'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불투명 수채, 과슈 (gouache)
일반적으로 과슈는 수용성의 아라비아 고무를 교착제로 반죽한 중후한 느낌의 불투명 수채물감 혹은, 그러한 물감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들을 말하는데요. 과슈는 아라비아 검과 여러 가지 불투명한 성분들이 다양하게 혼합된 것으로 제조법이 회사마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불투명 수채라는 한가지 정의에는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과슈를 불투명 수채라 할 수 있습니다.
아라비아 검(아라비아 고무)와 현대의 과슈 물감
과슈는 수채화처럼 물과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수채화와 가장 비교되곤 합니다. 실제로 물을 많이 섞어 그린 과슈화는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는데요. 보통 과슈는 '흰색'을 섞어 물감의 톤을 조정하지만, 이때에는 물의 농담만으로 색을 조정하여 부드럽고 은은한 색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수채화처럼 그려진 과슈화 James McNeill Whistler, <Green and Silver - The Bright Sea, Dieppe>, 1883-1885
그러나 두 재료의 사용법과 성질은 매우 다릅니다. 가장 대표적인 차이는 수채화에서는 흰색 혹은 검은색 물감의 사용을 지양하는 반면, 과슈에서는 백색 물감을 사용하여 색을 만든다는 점입니다.
더불어 수채화의 경우에는 캔버스의 바탕면을 그대로 보여 주며 말 그대로 '투명하게' 발색이 되지만, 과슈는 덧칠을 하더라도 밑 색이 비치거나 하지 않아, 유화처럼 여러 번 덧발라 두껍고 불투명하게 칠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성질 때문에 과슈는 '불투명 수채'라고도 불리며, 유화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유화같이 보이는 과슈화 : 파블로 피카소의 과슈화들 Pablo Picasso, <Head> | <Head of a man> | <Head of a man> | <Head of woman> , 1908
또한 과슈를 두께감 있게 바르거나, 물감에 풀이나 아라비아 검을 섞어 두껍게 바른 후 빗으로 긁어내는 방법 등으로 세부 묘사를 하기도 하는데요. 이런 특징들은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과슈화들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위의 피카소의 작품에서 보이는 거친 붓 터치는 유화의 마티에르를 연상케합니다.
그러나 기름이 아닌 '물'을 사용하는 과슈화는 유화와 같은 윤기는 없는 대신에 보다 선명한 색감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마치 마른 옷이 물에 젖은 옷보다 색이 더 밝고 환해지는 것처럼, 마른 후에는 더욱 환해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슈의 역사 :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에는 유화나 수채화에 비해 덜 알려진 기법이지만, 그 뿌리가 같이하며 생각보다 매우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슈의 시작은 고대 이집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는 안료와 꿀, 접착제를 교착하면서, 추상적이게나마 과슈의 형태를 보이게 되는데요. 이후, 유럽의 중세 시대에도 삽화를 그릴 때 과슈를 사용했으며, 이 시기에 제작된 필사본 속 장식 그림 등이 주로 과슈로 그려졌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과슈 작품들 (좌) Albrecht Durer, <View of the Arco Valley in the Tyrol>, 1495 / (우) <Young Hare>, 1502
형식에 대한 특정한 정의는 없었지만, 과슈는 이렇듯 미술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성장해왔는데요. 15세기 말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독일 화가 뒤러가 자연의 풍경, 동물들을 담는 작품에서 과슈를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부드러운 광택, 깊이 있는 마무리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이후 바로크 시대에는 루벤스와 얀 반 아이크 등이 과슈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의 과슈 작품들 (좌) Pablo Picasso, <Two friends>, 1904 / (우) <Woman with raven>, 1904
근대에 들어서는 파블로 피카소, 헨리 무어 등이 과슈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는데요. 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가인 벤 샨이 과슈를 이용한 벽화를 제작하였으며, 투명 수채에다 과슈를 혼합한 작품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쉴레와 샤갈의 작품으로 보는 서양의 과슈화
▶ 에곤 쉴레 (Egon Schiele, 1890-1918)
(좌) Egon Schiele, <Seated Woman with Bent Knee>, 1917 / (우) <Upright Standing Woman>, 1912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인 에곤 쉴레는 과슈를 주로 사용해 작품 활동을 했던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잉크 혹은 연필 등의 재료와 과슈를 혼합하여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이 작품 역시, 종이 위에 연필, 수채, 그리고 과슈를 함께 활용한 그림입니다. 에곤 쉴레 특유의 과감하고 거친 드로잉과, 과슈의 진한 색감이 한데 어울려 탄생한 인물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오는데요. 과슈로 채색한 여인의 머리카락, 상의와 타이즈 등에서 재료의 질감, 두께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에곤 쉴레와 더불어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러시아의 화가 샤갈 역시 많은 과슈화를 남겼는데요. 특히 샤갈은 종교화에서부터 누드,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과슈를 사용했습니다.
샤갈의 과슈화는 매끄러운 광택감이 나타나지 않아, 두꺼운 질감과 선명한 색감이 더욱 효과적으로 다가오는데요. 물감을 두껍게 바른 부분에서는 유화에서 잘 보이는 마티에르가 느껴지기는 하나, 이미 칠해진 색 위에 다른 물감을 번지는 듯이 표현한 부분에서는 수채화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과슈를 애용하는 현대미술 작가 : 이윤정, 정윤영
예술가들은 그들이 원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더 나은 재료를 포용하고 탐색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두껍게 바를 수 있을 뿐 아니라 투명한 효과를 내기 위해 엷게 녹여 수채화식으로 사용이 가능했던 과슈는 예술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현대회화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 이윤정 작가
과슈는 밝은 색감을 표현하기에 좋은 재료 중 하나입니다. 이윤정 작가는 과슈를 사용하여 선명한 색조와 건조한 느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종이비행기들과 아름다운 색감으로 그려진 동양적인 풍경들이 재료와 잘 어우러져 묘하고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습니다. 위 작품은 캔버스 위에 그려졌는데요. 이처럼 과슈는 수채화와 달리 종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료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 정윤영 작가
오늘 날의 과슈는 단일 형태로 쓰이는 경우보다는 유채, 수채화 등과 같은 다른 소재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윤영 작가는 면에 한지콜라주, 유채, 수채, 과슈를 함께 사용하여 개성 강한 야생 식물들의 독특한 섭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그리는 대상은 특별하지 않지만, 과슈를 비롯해 다양하고 이질적인 재료들을 결합하여 독특하고 화사한 꽃의 이미지를 더욱 극대화했습니다.
이처럼 과슈는 유화나 수채화와는 다른 고유의 매력을 지닌 재료인데요. 활용 방식의 차이와, 여타 재료들과의 결합에 따라서도 각양각색으로 달라질 수 있기에 많은 작가들에게 사랑받는 과슈! 앞으로도 현대회화에서 과슈가 수행할 새로운 역할들을 기대해봅니다.